[시카다이/이노진] 그냥 조각글
어머니와의 약속이었다. 드센 편이었어도 웃을 때만큼은 화사한 꽃 같은 분이었다. 이노진은 어머니가 늘 미소를 보이길 바랐다. 그가 가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꽃집은 대대로 이어진 가업이었다. 어머니도 어렸을 때 자주 일을 거들었다고 했다. 아카데미에 가지 않는 날 이노진은 여기에 나왔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은 그랬다.
여러 빛깔의 꽃들이 색상별로 가지런히 정리 되어 있었다. 언제 아버지가 무심코 해놓은 배치인데, 어머니는 꽤 마음에 드셨는지 그 뒤로 늘 꽃을 이런 방식으로 두었다. 어머니가 취급하는 꽃들은 유독 향이 진하지 않았다. 대신 은은함이 오래 갔다. 꽃집에 오래 있어도 향기에 취해 머리 아픈 일은 없었다. 이노진은 계산대를 두고 앉아 종종 이 광경을 그렸다. 꽃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다른 세계에 폭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곳은 누군가 열심히 짜놓은 물감 덩어리들이었다. 건드리면 수채화처럼 어딘가에 번지고 퍼져, 끝내 완전히 꽃으로 피어났다. 아버지만큼 실재적으로 담아낼 순 없었지만 그리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가 몰두하고 있는 동안 손님 하나 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가게가 조용했다.
“야. 이노진.”
친숙한 목소리였다. 이노진은 스케치북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날카로운 녹색 눈동자가 저를 향해있었다. 뭐하나 했는데, 또 그림 그리고 있었냐. 계속 불렀다고. 시카다이가 심드렁하게 말을 툭 던지며 제 뒷목을 긁적였다. 그의 나머지 손엔 봉지가 들려 있었다. 어, 어? 순간 바보 같은 소리가 나왔다. 곧바로 덧붙이듯 사과했다. 미안해. 전혀 못 들었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노진은 급하게 스케치북을 접었다. 공상에 젖어 끼적대던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시카다이는 느긋하게 하품만 했다. 대충 주변의 잡동사니를 정리한 이노진이 자리서 일어났다. 어쩐 일로 왔냐고 물어볼 찰나에 시카다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심심해.”
이노진은 눈을 깜빡였다.
“나 게임기 안가지고 내려왔는데.”
“나도 그래.”
그냥 여기서 시간만 대충 때우면 돼. 시카다이는 허락도 받지 않고서 대뜸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어차피 뭐라 할 생각도 없었다. 이노진은 옅게 한숨을 쉬곤 미소를 보였다. 그가 좀 더 편안한 자세로 턱을 괸 채 물었다. 너 쉬는 날 밖으로 잘 안 나오잖아. 귀찮다며. 지금은 집에 있는 게 더 귀찮아. 시카다이가 두어 번 다리를 떨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노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카다이는 대답 대신 봉지를 계산대에 올려뒀다. 일단 신세지는 값이야. 와. 완전 제멋대로잖아. 한결 여유를 찾은 이노진이 여과 없이 그를 질책했다. 봉지에선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가 나왔다. 콘소메맛 감자 칩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론 부족해. 오늘 하루 나 좀 도와줘.”
“……귀찮게.”
어쨌든 거부의 뜻은 아니었다.
사실은 대충 알아채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 상황이 몇 번 벌어졌으니까. 분명 집에서 무슨 일이 생겼고, 그건 아마 어머니와 관련됐을 테지. 말 그대로 시카다이는 여기에 대피 온 셈이었다. 가게 안에서 시카다이는 계속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입술을 삐죽대기까지 했다. 그가 은연중에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에도 이노진은 곁에서 한가하게 과자를 해치웠다. 친구의 성미를 더 돋울 마음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열심히 부려먹어야지. 그가 눈웃음 쳤다.
생각보다 시카다이는 군말 없었다. 알아서 저가 움직이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거야 이노진의 예상 범위 내 행동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부탁하는 일은 웬만해서 나서줬다. 화병을 몇 개씩이나 옮기는 것도 꿋꿋이 해냈다. 매번 아카데미에서 엎드려 있던 그를 떠올리자면 신기할 노릇이었다. 넌 매번 이런 걸 해? 잠시 쉬던 시카다이가 질문을 던졌다. 가게에 나와 있는 동안은. 이노진은 그 사이 주문 받은 꽃바구니를 엮었다.
“귀찮지 않아?”
“딱히 그런 생각, 하지 않았으니까.”
너야말로 여기 있는 거 엄청 귀찮을 것 같은데? 잔가지를 쳐내던 이노진이 한가롭게 되물었다. 시카다이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가위를 내려놨다. 이노진은 덩달아 잠자코 있다가 이내 씩 미소를 띠었다.
“엄마랑 약속한 거거든.”
“약속?”
“시간 날 때 한 번씩은 가게를 보는 거.”
“아아.”
네 엄마도 우리 엄마 못지않게 무서운 분이지. 시카다이가 투덜댔다. 아하하. 이노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뭇잎 마을 또래 친구들의 어머니는 대다수 그런 편이었다. 확실히 우리 엄마가 화가 나셨을 땐 곤란해. 그래도 말이야, 그런 쪽으로 되새기기보단……. 시카다이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분명 이 시답잖은 이야기에 관심이 커보였다.
“엄마가 웃는 모습을 더 떠올리는 거지.”
“그게 뭐야.”
미운 말을 입에 담았어도 시카다이의 눈빛은 여전했다. 이노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아닌데. 그를 자극할만한 말은 최대한 피했다. 그냥, 그게 더 기분이 좋잖아. 우리 엄마 웃음은 예쁘니까. 시카다이가 고개를 바로 했다. 이노진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서 리본 매듭을 묶었다.
그림자가 옆으로 기울며 늘어나나 싶더니,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어머니가 내려왔다. 이노는 아들 옆에 앉아있는 시카다이를 발견하고서 눈을 깜빡였다. 어머. 시카다이도 와 있었니? 아아, 안녕하세요. 시카다이가 고개를 까닥였다. 이노는 천천히 미소를 보였다. 저녁 시간이란다. 가게 문 닫고 올라오렴. 시카다이도 먹고 가지 그러니? 시카다이가 몸을 일으켰다. 아뇨 괜찮아요. 그러니까……. 친구는 잠시 머뭇대다 말을 이었다. 엄마가 기다리실 거예요. 이만 가볼게요. 그런 그를 관전하듯 쳐다보고 있던 이노진이 씩 웃었다.
어머니가 올라간 것을 확인한 이노진이 옆 바구니에 있던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속지까지 끼워 그럴듯하게 포장한 뒤 시카다이에게 억지로 떠넘겼다.
“이게 뭐야.”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고.”
이노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한참동안 꽃을 바라본 친구가 결국 토를 달았다.
“……시시하긴.”
그래도 그렇게 들고 갈 거면서. 점점 멀어지는 시카다이의 등을 보며 이노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말은 저렇게 했어도, 꽃은 분명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질 것이다. 위에서 어머니가 이노진을 다시 불렀다. 그는 팻말을 뒤집어놓고 가게 문을 닫았다. 잘 해결됐으면 좋겠는데.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왠지 그리고픈 게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