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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다이/이노진] 그냥 조각글

프리가 2015. 11. 13. 16:51



 

 

어머니와의 약속이었다. 드센 편이었어도 웃을 때만큼은 화사한 꽃 같은 분이었다. 이노진은 어머니가 늘 미소를 보이길 바랐다. 그가 가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꽃집은 대대로 이어진 가업이었다. 어머니도 어렸을 때 자주 일을 거들었다고 했다. 아카데미에 가지 않는 날 이노진은 여기에 나왔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은 그랬다.

여러 빛깔의 꽃들이 색상별로 가지런히 정리 되어 있었다. 언제 아버지가 무심코 해놓은 배치인데, 어머니는 꽤 마음에 드셨는지 그 뒤로 늘 꽃을 이런 방식으로 두었다. 어머니가 취급하는 꽃들은 유독 향이 진하지 않았다. 대신 은은함이 오래 갔다. 꽃집에 오래 있어도 향기에 취해 머리 아픈 일은 없었다. 이노진은 계산대를 두고 앉아 종종 이 광경을 그렸다. 꽃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다른 세계에 폭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곳은 누군가 열심히 짜놓은 물감 덩어리들이었다. 건드리면 수채화처럼 어딘가에 번지고 퍼져, 끝내 완전히 꽃으로 피어났다. 아버지만큼 실재적으로 담아낼 순 없었지만 그리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가 몰두하고 있는 동안 손님 하나 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가게가 조용했다.


 

 

. 이노진.”

친숙한 목소리였다. 이노진은 스케치북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날카로운 녹색 눈동자가 저를 향해있었다. 뭐하나 했는데, 또 그림 그리고 있었냐. 계속 불렀다고. 시카다이가 심드렁하게 말을 툭 던지며 제 뒷목을 긁적였다. 그의 나머지 손엔 봉지가 들려 있었다. , ? 순간 바보 같은 소리가 나왔다. 곧바로 덧붙이듯 사과했다. 미안해. 전혀 못 들었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노진은 급하게 스케치북을 접었다. 공상에 젖어 끼적대던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시카다이는 느긋하게 하품만 했다. 대충 주변의 잡동사니를 정리한 이노진이 자리서 일어났다. 어쩐 일로 왔냐고 물어볼 찰나에 시카다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심심해.”

이노진은 눈을 깜빡였다.

나 게임기 안가지고 내려왔는데.”

나도 그래.”

그냥 여기서 시간만 대충 때우면 돼. 시카다이는 허락도 받지 않고서 대뜸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어차피 뭐라 할 생각도 없었다. 이노진은 옅게 한숨을 쉬곤 미소를 보였다. 그가 좀 더 편안한 자세로 턱을 괸 채 물었다. 너 쉬는 날 밖으로 잘 안 나오잖아. 귀찮다며. 지금은 집에 있는 게 더 귀찮아. 시카다이가 두어 번 다리를 떨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노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카다이는 대답 대신 봉지를 계산대에 올려뒀다. 일단 신세지는 값이야. . 완전 제멋대로잖아. 한결 여유를 찾은 이노진이 여과 없이 그를 질책했다. 봉지에선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가 나왔다. 콘소메맛 감자 칩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론 부족해. 오늘 하루 나 좀 도와줘.”

……귀찮게.”

어쨌든 거부의 뜻은 아니었다.


 

 

사실은 대충 알아채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 상황이 몇 번 벌어졌으니까. 분명 집에서 무슨 일이 생겼고, 그건 아마 어머니와 관련됐을 테지. 말 그대로 시카다이는 여기에 대피 온 셈이었다. 가게 안에서 시카다이는 계속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입술을 삐죽대기까지 했다. 그가 은연중에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에도 이노진은 곁에서 한가하게 과자를 해치웠다. 친구의 성미를 더 돋울 마음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열심히 부려먹어야지. 그가 눈웃음 쳤다.

생각보다 시카다이는 군말 없었다. 알아서 저가 움직이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거야 이노진의 예상 범위 내 행동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부탁하는 일은 웬만해서 나서줬다. 화병을 몇 개씩이나 옮기는 것도 꿋꿋이 해냈다. 매번 아카데미에서 엎드려 있던 그를 떠올리자면 신기할 노릇이었다. 넌 매번 이런 걸 해? 잠시 쉬던 시카다이가 질문을 던졌다. 가게에 나와 있는 동안은. 이노진은 그 사이 주문 받은 꽃바구니를 엮었다.

귀찮지 않아?”

딱히 그런 생각, 하지 않았으니까.”

너야말로 여기 있는 거 엄청 귀찮을 것 같은데? 잔가지를 쳐내던 이노진이 한가롭게 되물었다. 시카다이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가위를 내려놨다. 이노진은 덩달아 잠자코 있다가 이내 씩 미소를 띠었다.

엄마랑 약속한 거거든.”

약속?”

시간 날 때 한 번씩은 가게를 보는 거.”

아아.”

네 엄마도 우리 엄마 못지않게 무서운 분이지. 시카다이가 투덜댔다. 아하하. 이노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뭇잎 마을 또래 친구들의 어머니는 대다수 그런 편이었다. 확실히 우리 엄마가 화가 나셨을 땐 곤란해. 그래도 말이야, 그런 쪽으로 되새기기보단……. 시카다이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분명 이 시답잖은 이야기에 관심이 커보였다.

엄마가 웃는 모습을 더 떠올리는 거지.”

그게 뭐야.”

미운 말을 입에 담았어도 시카다이의 눈빛은 여전했다. 이노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아닌데. 그를 자극할만한 말은 최대한 피했다. 그냥, 그게 더 기분이 좋잖아. 우리 엄마 웃음은 예쁘니까. 시카다이가 고개를 바로 했다. 이노진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서 리본 매듭을 묶었다.

 

 


그림자가 옆으로 기울며 늘어나나 싶더니,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어머니가 내려왔다. 이노는 아들 옆에 앉아있는 시카다이를 발견하고서 눈을 깜빡였다. 어머. 시카다이도 와 있었니? 아아, 안녕하세요. 시카다이가 고개를 까닥였다. 이노는 천천히 미소를 보였다. 저녁 시간이란다. 가게 문 닫고 올라오렴. 시카다이도 먹고 가지 그러니? 시카다이가 몸을 일으켰다. 아뇨 괜찮아요. 그러니까……. 친구는 잠시 머뭇대다 말을 이었다. 엄마가 기다리실 거예요. 이만 가볼게요. 그런 그를 관전하듯 쳐다보고 있던 이노진이 씩 웃었다.

어머니가 올라간 것을 확인한 이노진이 옆 바구니에 있던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속지까지 끼워 그럴듯하게 포장한 뒤 시카다이에게 억지로 떠넘겼다.

이게 뭐야.”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고.”

이노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한참동안 꽃을 바라본 친구가 결국 토를 달았다.

……시시하긴.”

그래도 그렇게 들고 갈 거면서. 점점 멀어지는 시카다이의 등을 보며 이노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말은 저렇게 했어도, 꽃은 분명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질 것이다. 위에서 어머니가 이노진을 다시 불렀다. 그는 팻말을 뒤집어놓고 가게 문을 닫았다. 잘 해결됐으면 좋겠는데.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왠지 그리고픈 게 하나 더 생겼다.